무너질 것만 같을 때 - 에세이 2편: 의심에서 확신으로
진솔한 표현을 위한 거친 언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을 때 유의 바랍니다.
수능이 끝난 나는 무력했다. 그저 무력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자존감이 극도로 낮아진 상태에서 반수 선언을 했다.
부모님께 말도 안하고 수업도 나가지 않고 흔히 말하는 '학고반수'를 결심했다.
어영부영 하루하루가 지나간 뒤 나는 그렇게 대학을 진학하게 된다.
기숙사에서 살면서, 여러 가지 소식이 들려온다.
첫날부터 싸움나서 누군가의 앞니가 부러져서 경찰이 오고, 누구는 룸메랑 맞짱을 떴다느니 무단 대실을 했다느니...
나한테는 너무도 큰 스트레스였다.
'내가 이딴 새끼들이랑 대학 같이 다니려고 온 거야?'
모순적이게도 난 대학 서열 나누기를 싫어함에도, 대학 서열을 어느 정도 본다.
공부야말로 그 사람의 노력의 척도를 판가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지표니까.
그런데 6등급 7등급 맞는 애들도 오는 대학에 온 것이다.
내 노력과 내 인생, 아니 내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이 사람들이랑 더는 엮이기 싫었기에 억지로 도서관에 나가서 공부했지만, ADHD답게 공부는 정말 효율이 안 나왔다.
도서관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도 슬슬 지쳐가기 시작하고, 스트레스는 ADHD와 우울증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점점 무기력함이 날 덮쳐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 6시였던 기상시간이 9시까지 늘어졌고, 어떤 날은 오후2시까지 뻐져 자기도 했다.
ADHD의 연관증상 중 하나인 수면위상지연증후군이 생긴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내가 우울증이나 ADHD가 있는 줄도 몰랐다.
우울함은 학기 끝나기 전에 극에 달했고, 그 상태에서 할머니 댁에 갈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가는 할머니 댁인데다 어머니날이었나? 어버이날이었나 그랬을 거라 선물로 꽃을 샀다.
일주일 전부터 짐을 싸두고, 몇번이고 체크하고 체크하고 체크했다. 이쯤되면 강박장애도 있는가 싶다.
그리고서 기차역으로 버스를 타고 갔는데, 기차에 오르고 멍하니 바깥을 보던 중...
뭔가 직감이 발동했다.
'뭔가 잘못됐다.뭐지? 어라? 아!!'
그랬다.
나는 대차게 꽃을 기숙사에 놔두고 기차에 올랐던 것이었다.
순간 심장 속에서 응어리진 무언가가 나를 정말 으스러지도록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씨발... 할머니 선물인데...씨발...씨발...이 멍청한 새끼야..그거 하나 기억을 못하고...'
낮아진 자존감으로 인해 내 이성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후드티를 푸욱 내려쓰고 기차 안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옆자리 승객은 웬 시커먼 후드 입은 애가 눈물질질 흘리는거보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ㅋㅋㅋㅋ)
'왜...왜 난 이모양이야...왜... 이런거 하나 기억을 못하는데...'
이때 내가 우울증이나 ADHD가 있을 거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비누꽃이라 망정이지 생화였으면 정말 혀를 깨물고 싶었을 거다. ㅋㅋㅋ)
그날 기차역에 내리고 차를 타고 가면서 정신과를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근데...아시다시피 어른들,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나 보수적인 분들,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이 없는 분들은
정신과를 하얀 방안에 구속복 입고 감옥마냥 가둬놓는 곳으로 인식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거부당했고,
'니가 공부를 안하니까 불안한 거다, 니가 공부 열심히 하면 해결된다, 니 의지 문제다.' 라는 소리를 들었다.
속으로는
'공부가 잘 안되니까 불안한 거지. 그리고 내가 열심히 안했겠냐? 그게 됐으면 내가 진작 대학 갔지.
내 의지로 깨는게 되냐? 12시간을 자도 피로가 이상하리만치 안풀린다니까? 아침에 죽어도 못일어나겠다니까?
의지문제라는 개소리 좀 그만하면 좋겠는데. 난 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겠는데.'
라고 소리치고 있었으나...
조부모님 앞에서 쌍소리 해가면서 울고불고 난리치는 것도 장남으로써 꼴사나우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물러났다.
그저 가족이랑 시간을 보내니 우울 증세도 나아지는 것 같았고, 진짜로 내 의지 문제인가 싶기도 해서
더 버텨보기로 했다. 어차피 곧 휴학하고 서울로 올라올 계획이기도 했고.
서울로 올라와서도 내 생활은 바뀔 줄을 몰랐다.
아침 7시에 엄마가 깨워서 겨우 비척대며 일어났고, 피로가 끊이질 않았다.
일찍 안 자서 그런가? 하고 일찍 자도 아침엔 여전히 피곤했고, 그 피로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허벅지를 찌르고, 서서 공부하거나 세수를 해도 5분도 못 가서 몸은 앞으로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몇몇 선생들은 그렇게 졸 거면 자기 수업에 들어오지 말라면서 나를 몰아세웠다.
다른 학생들이 쳐다볼 때면 그 눈빛들이 날 한심하다고 쳐다보는 것 같았다.
부끄러웠다. 서러웠다. 울고 싶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난 망가졌다.
그것도 아주 크게.
몸과 마음 다방면으로 쌓여버린 상처와 지각을 뚫고 맨틀까지 내려간 자존감은
내 정신력과 체력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이건 내 의지 문제가 아니다.
이건 병이다.
ADHD가, 의심에서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